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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저널리즘은 `시민과 협력하라는 메시지`

Online_journalism 2012.09.13 10:16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시민과 저널리즘을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언론사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한지 오래다. 유튜브의 성과는 전통매체 종사자들에게 저널리즘 패러다임의 대이동을 황홀하게 그리고 우울하게 제시한다.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가 뉴스 전달 매체로서 주목받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PewResearchCenter)의 유튜브와 뉴스(YouTube&News) 보고서에 따르면 중요한 사건·사고 소식을 실시간 시청하려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른바 ‘유튜브 저널리즘’이 활성화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유튜브 뉴스 동영상의 타입, 가장 인기있는 뉴스 동영상의 생산 주체, 전통매체 뉴스 동영상과의 차이점 등을 다룬 퓨 리서치 센터 보고서는 2011년 1월~2012년 3월까지 유튜브 뉴스 부문 동영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1. 유튜브 뉴스 동영상은 ; 인물 보다는 ‘사건’에 주목한다

 

이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살펴 보면 우선 5개월간 최고 검색어에 ‘뉴스’와 관련된 것들이 쏟아졌다. 재해(19.6%), 정부(13.8%), 데모·소란(9.2%) 등이 그것이다.

 

이중 유튜브 재생 횟수 1위에 오른 뉴스 동영상은 일본의 동북부 해안을 강타한 지진 및 쓰나미와 관련된 것으로 총 260건의 동영상 중 5.4%에 해당했다. 러시아 선거(4.6%), 중동 민주화 혁명(4.2%)은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다. 이어서 미국 인디애나주 야외 무대 붕괴나 이탈리아 크루즈선 침몰 등도 인기를 모았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 직후 1주일 동안에는 유튜브 뉴스 동영상 상위 20위까지의 동영상이 모두 일본 대지진 소식이었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일본 지진 관련 동영상은 재난 직후 일주일간 무려 9,600만 번이나 조회됐고 센다이 공항에 쓰나미가 밀려오는 동영상의 경우는 약 1,270만 번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반면 ‘인물’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낮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4.2%로 1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1.5%)의 사망, 러시아 자유민주당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당수(1.5%) 순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가장 많이 본 뉴스 동영상의 대부분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재해나 사건·사고 장면을 담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뉴스 동영상 소비가 ‘(현장을 포착한)장면’에 주목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TV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이용자들에 비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평균 2,200만 명의 미국인들이 3개의 전국 채널을 통해 저녁 TV뉴스를 시청한다. 지역방송국 TV 뉴스로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할 것으로 추정된다.

 

2. 유튜브 뉴스 동영상은 ; 핫 이슈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유튜브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청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주문형’-‘맞춤형’이 가능한 플랫폼이라는 점에서 TV시청과는 다른 매력을 갖는다.

 

더욱이 유튜브는 목격자가 촬영한 동영상을 보려는 시민들이 적극 활용한다. 동일본 지진 뉴스의 경우 유튜브 상에서 수 주 동안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물론 뉴스 동영상은 다른 종류의 동영상에 비해 회자되는 수명은 짧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특정한 엔터테인먼트 동영상이 가장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한 이슈가 발생한 시점에선 가장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 비디오를 앞지를 만큼 뉴스 동영상의 힘이 강력한 것으로 확인됐다. 2011년 12개월 중 4개월을 동일본 지진, 오사마 빈 라덴 사망, 오토바이 사고 등 뉴스 관련 검색이 줄곧 1위를 차지했다.

 

유튜브 인기 뉴스 동영상의 평균 길이는 2분 1초로 조사됐다. 전국을 커버하는 방송국의 저녁뉴스(2분 23초)에 비해서는 짧지만 지역방송국 TV뉴스의 평균 길이(41초)보다 확실히 긴 편이다.

 

주목할 부분은 전통적인 TV뉴스 분량은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는 반면 유튜브는 1분 미만(29%), 1분~2분(21%), 2~5분(33%), 5분 이상(18%) 등으로 비교적 균등하게 분산됐다.

 

유튜브 뉴스 동영상의 생산 주체를 살펴보면 시민의 역할이 급부상한 것으로 파악됐다. 인기 뉴스 동영상의 51%는 언론사가 생산한 것이지만 시민이 직접 생산한 동영상도 39%에 달했다. 언론사가 생산한 뉴스 동영상의 경우 사실상 시민이 촬영한 것이 포함돼 있었다.

 

3. 유튜브 뉴스 동영상은 ; 전통매체 못지 않게 시민이 주도한다

 

또 한 가지 살펴볼 부분은 뉴스 동영상의 출처(source)가 다변화하는 점이다. 언론사나 시민 못지 않게 기업이나 정치단체, 출처 미상이 각각 5%의 비중을 차지했다. 더욱이 센다이 공항과 해안 경비선의 고정 카메라 등 동일본 지진 뉴스 동영상처럼 이색적인 경우도 있었다.

 

뉴스 동영상의 게시자와 동영상의 편집여부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5개월 동안 인기 뉴스 동영상의 61%는 언론사가 게시한 것이지만 시민에 의해 재게시된 것도 39%나 됐다.

 

특히 인기있는 뉴스 동영상 중 58%는 편집 동영상이고, 42%는 원본 동영상이었다. 원본과 편집본을 합친(mixed) 동영상의 65%는 언론사가 생산한 동영상이고, 39%는 시민이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튜브에서 언론사와 시민의 관계가 보다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시민은 스스로 비디오를 만들어 게시할 뿐만 아니라 언론사가 제작한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공유한다.

 

언론사는 시민이 생산한 콘텐츠(UGC)를 자사의 뉴스 생산 과정에 인용한다. 시민은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고 공유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TV뉴스를 창조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에이미 미첼 퓨 리서치 부소장은 “유튜브가 새로운 형태의 비주얼 저널리즘(visual journalism)을 만들어냈다”면서 “언론사와 시민의 관계가 이전의 다른 플랫폼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들은 종종 목격자인 시민이 올린 것처럼 여겨지는 동영상을 게시할 때가 있다. 이는 원 저작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표시하지 못하는 경우다. 시민도 언론사의 허락없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아야 할 동영상을 버젓이 올리기도 한다. 또한 어떤 동영상은 누가 만든 것인지조차 알아내기 힘들다.

 

4. 유튜브 저널리즘은 ;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유튜브 저널리즘이 풀어야 할 숙제가 동영상의 출처 확인 등 전반적인 ‘신뢰도 제고’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유튜브가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에 대해 모든 이해 관계자들이 윤리적 책임이나 기준을 따를 가능성이 낮아 영상 콘텐츠의 왜곡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했다.

 

바꿔 말하면 전통매체의 프로페셔널 저널리즘과 시민의 아마추어 저널리즘간의 경연장이 되고 있는 유튜브는 전문성이란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튜브는 2009년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 등 다수의 현직 기자들이 출연하는 동영상 강좌 서비스 ‘유튜브 리포트 센터’를 개설했다. 이 강좌는 시민저널리즘의 위상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시민에 대한 저널리즘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보다 차별화한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로이터 통신을 비롯 뉴스 공급자들과 파트너십에 적극 나선 바 있다. 2007년 콘텐츠 제작자와 수익을 공유하는 파트너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이를 통해 BBC, CBS,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언론사를 포함 27개국에서 다양한 뉴스 콘텐츠 공급자를 보유했다.

 

이와 함께 유튜브는 언론사들이 유튜브 동영상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오픈 플랫폼인 ‘유튜브 다이렉트(YouTube Direct)’를 오픈했다. 시민이 콘텐츠를 생산하면 이를 언론사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언론사는 시민이 생산한 콘텐츠를 쉽게 확보할 수 있고 시민은 언론사 사이트에 자신의 동영상을 노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플랫폼이다.

 

유튜브는 스스로 뉴스 공급자가 되려는 건 아니라고 밝히지만 전 세계에서 72시간 분량의 동영상이 1분 간격으로 업로드되고 매일 4억 개 이상의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유튜브야말로 어느덧 가장 거대한 뉴스 공급원으로 성장했다.

 

5. 유튜브 저널리즘은 ; 전통매체의 위기와 기회를 의미

 

유튜브나 다른 동영상 공유 사이트의 성장은 전통매체에겐 기회인 동시에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전통매체의 대응은 대체로 미흡한 상황이다.

 

전통매체는 방문자수를 늘리고 시민이 생산한 콘텐츠를 수집하는 등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매출을 늘리기 위해 자사의 사이트 운영에 주력하고 있다. 외부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는 여전히 낯선 플랫폼 중의 하나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집단지성의 힘을 활용하는 뉴욕타임즈의 ‘크라우드 펀딩 저널리즘(crowd-funded journalism)이나 기사 예고제를 시도해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가디언의 오픈 저널리즘(open journalism)처럼 해외 전통매체는 수 년 전부터 협력 저널리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번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는 ‘유튜브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국내 언론사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네트워크와 컨버전스의 정점에 자리잡은 유튜브와 그 콘텐츠는 기존 전통매체에 못지 않게 뉴스 영향력-대중에게 도달하는 반경이 상당히 넓다. 이미 수많은 언론사들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세계의 시민들과 만나고 있는 점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둘째, 디지털 컨버전스는 직업기자가 수행하는 저널리즘 즉,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시민이 확보하고 있는 저렴한 디지털 장비와 접근성이 높아진 네트워크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손쉽게 제작하고 유통하는데 효과적인 도구가 된지 오래다.

 

셋째, 전통매체 뉴스룸은 점점 시민이 생산한 콘텐츠를 활용하고 있다. 웹 사이트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시민의 제보 동영상을 수집하는 채널은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그리고 뉴스 프로그램에 이를 반영하거나 소셜네트워크에서 광범위하게 모니터링하는 과정도 보편화하고 있다.

 

6. 유튜브 저널리즘은 ; 시민과 언론의 협력이 관건

 

넷째, 유튜브의 성장은 전통매체와 기자들이 독점한 여론 시장의 지배력에 위축을 가져온 동시에 수준 높은 저널리즘에 대한 시민의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시민은 (전통매체와는 다른 방향으로) 여론을 키울 수 있다. 동시에 소셜네트워크의 불확실한 콘텐츠보다 전문적인 저널리즘의 수요도 커진다.

 

이제 저널리즘의 미래를 위해 전통매체와 소셜네트워크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주장이 아니다. 그동안 전통매체는 시민을 뉴스 소비자로 한정해왔으나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에서의 시민은 전통매체와 대등한 역할을 수행할만한 파트너로 성장한 상태다.

 

결국 시민을 껴안는 저널리즘은 전통매체가 가야할 운명으로 보여진다. 유튜브는 하나의 열쇠이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모이는 시민의 의식과 태도를 눈여겨 봐야 한다. 그들은 ‘공유’와 ‘참여’에 익숙하다. 또한 (전통매체의 뉴스를) 퍼뜨리는 일에 민감하다.

 

유튜브가 비록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전통매체가 이 부분을 메꿔준다면 활력에 찬 저널리즘의 재생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언론사와 시민 사이에 상호적 관계 형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언론사는 시민의 목소리가 제때에 수렴되는 유연한 뉴스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뉴스룸의 성찰을 끌어내는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뉴스룸과 시민의 대화를 늘리는 등 저널리즘의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특히 시민이 만든 콘텐츠를 언론사의 온라인 및 오프라인 서비스에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포함해 체계적인 보상과 협력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 유튜브 같은 참여와 공유의 플랫폼에서 시민과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다. 미래는 더 이상 혼자 저널리즘을 독점할 수 없다. 유튜브와 그 뉴스들이 지금, 시시각각 전하고 있다.

 

덧글. <신문과방송>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실제 게재된 원고와 다를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논란

자유게시판 2011.07.28 14:29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방송통신심의위원인 고려대 박경신 교수(법학)의 블로그 게시물이 논란이 되고 있다. 박 교수가 어제, 오늘 사이 올린 게시물의 '음란성'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공인이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박 교수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방통심위)는 지적과 함께 그 정보가 지나치게 음란하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박 교수를 비롯 지지자들은 '음란하다'는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표현의 자유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국가가 개인의 표현물을 일일이 재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박 교수가 오늘 등록한 게시물은 포털에서 누구나 검색할 수 있는 미술작품에 불과하지만 마녀사냥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건은 확장된 표현공간과 국가기구의 검열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공적 커뮤니케이션과 사적 커뮤니케이션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제도의 퇴행성과 행위의 결연성 모두 위험한 경계에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온라인 공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기득권의 이기주의를 노골화할 수 있다. 또 정치적, 이념적 문제로 비화할 개연성도 적지 않다. 특히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늘어나면서 이번에도 '표현의 자유'라는 본질적 측면과 온라인에 대한 가치부여라는 분기점을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이 더럽단다. 기득권은 대체로 변화가 필요한 때에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체계를 부정한다. 따지고보면 이같은 방향을 유도하는 것이 전통매체와 그 프레임에 합류한 지식인들이라는 것은 이제 더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사회적 논의 그 자체를 위해(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싶다), 위험한 도전에 오른 박 교수를 응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는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표현의 자유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표현의 자유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은 지적으로 충만하고 교양과 철학이 온전한 사회에서는 전폭적으로 지지받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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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시대, 기자란 무엇인가

Online_journalism 2011.06.23 09:07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미디어오늘 6월22일자. 일부 기자들이 SNS에서 사회참여에 주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시대 기자에게 거는 시민사회의 기대가 큰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소통이 권장될수록 기자윤리는 금과옥조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6월22일자 <소셔널리스트가 던진 화두 '기자란 무엇인가'>기사에 대한 것이다. 내 발언(이미지 내 큰 박스에서 발췌)이 인용돼 있지만 뜻이 다르게 전달될 수 있어 포스트를 등록한다.

오늘날 언론사에게 소셜네트워크는 결정적인 것이 되고 있다. 그것은 소셜네트워크의 독자가 뉴스, 기자, 언론사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있어서다.

첫째, 소셜네트워크의 독자는 다른 친구들에게 뉴스를 전달하는데 이때 뉴스는 보이진 않지만 '신뢰' 내지 '권유'라는 덤을 얹은 상태가 된다.

둘째, 이 뉴스는 보다 많은 독자에게 읽혀지면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뉴스를 제공하는 언론사의 인지도를 높인다. 

셋째, 소셜네트워크의 기자는 독자와 소통하면서 손 댈 수 없는 완성품으로서의 뉴스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뉴스를 이해하게 된다. 독자와의 공감에 눈 뜨는 것이다.

넷째, 이로써 기자와 독자 사이에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처럼 새로운 저널리즘의 문명이 열린다.

이미 소셜네트워크는 저널리즘으로 충만한 상태다. 독자는 뉴스를 읽을 준비가 돼 있고 비평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상당수 뉴스룸과 기자들이 소셜네트워크에 뛰어 들어 독자를 상대하고 있다.

거대하고 공개적인 소셜네트워크 무대는 기자와 독자의 접점을 늘려 가고 있다. 뉴스를 유통하고 정보와 뉴스 아이템을 수집하는 정도 즉, 소극적인 소통으로는 한계도 드러난다.

많은 독자가 기자와 언론사를 향해 질문하고 있다. 비판과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민감한 이슈는 뉴스룸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소셜네트워크에서 '의도적', '편파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뉴스가 회자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독자의 부정적인 의견은 언론사의 평판을 걷잡을 수 없이 나쁘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자가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한다. 근무하고 있는 언론사의 논조가 모든 기자에게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치적 현안과 관련해 기자의 소신은 언론사의 논조와 배치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에서 기자는 그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민감한 이슈에 대한 기자의 개인 견해는 열렬한 지지 독자와 반대 독자를 양산한다.

언론사와 소속 기자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기자가 곤경에 처할 가능성은 더 높다. 뉴스룸은 기자에게 책임을 즉시 물을 수 있다. 같은 관점을 가졌다고 해도 기자 개인의 견해가 공표된다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기자는 다른 어떤 직업보다 윤리가 강조된다. 공정성, 객관성, 중립성 같은 저널리즘의 가치를 수호하는 특수한 직업인이다. 국민의 알 권리, 진실을 알릴 의무, 민주화와 국가발전, 민족 동질성 회복 같은 거창한 시대적 소명도 갖고 있다.

이 기자가 한쪽 방향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수록 독자는 점점 기자의 기사를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 기자의 견해를 반대하는 독자일수록 불쾌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기자의 소셜네트워크 소통방식을 일률적으로 측정하기란 어렵다. 모든 것이 저널리즘 활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속성, 신속성, 일방성, 반복성이 되풀이 된다면 논란은 피할 수 없다. 지식인으로서 기자의 사회적 소명을 소셜네트워크에서 어떻게 구현해낼지가 관건이다.




가령 기자가 소극적인 견해를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집회나 시위에 가담하는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게 된다면 정당, 정부 같은 이해 관계자들에게는 '동지'인가 아닌가로 구별될 뿐이다.

최근 기자의 소셜네트워크 참여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부작용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첫째, (정치적 현안에 대해) 기자의 견해가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둘째, 기자가 사실상 정치활동을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셋째, (이러한 기자 활동이) 뉴스룸의 묵인 내지 무관심 하에 이뤄지고 있다.

해외 언론사의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자들의 소셜네트워크 활동은 과열돼 있는 상황이다. 이는 과정으로서의 뉴스 즉, 독자와 이야기하고 독자의 의견, 제보를 수집해 새로운 뉴스 생산에 반영하는(피드백) 소셜네트워크의 소통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기자는 자사 뉴스룸과는 다른 의견들, 또는 공감하고 있는 내용들을 소셜네트워크의 독자로부터 수집하고 이를 적기(just in time)에 다시 생산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뉴스룸이 유연하고 개방적인 뉴스 생산 과정을 갖추도록 내부 소통을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왕성한 외부 정치활동을 담보하는 것이 기자의 소셜네트워크 소통의 모범답안으로 흐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정작 뉴스 생산 과정 전반에 혁신이 일어나야 할 국내 보수언론과 그 기자들은 트래픽 올리기만 집중하는 것도 유감스럽다.

이는 뉴스룸 안에 소셜네트워크 활용전략이 부재한 탓에서 비롯한다. 뉴스룸 차원이 아니라 기자 개인의 지명도, 역량에만 기대고 있어서다. 이렇다한 소셜네트워크 가이드라인도 갖춰 놓지 않은 채 기자의 열정과 소신, 양심에만 의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해외의 경우 기자들은 종종 자신의 매체를 밝히지 않고 익명(필명)으로 소셜네트워크를 부유한다. 그래도 독자들이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기자는 사인(私人)의 아이덴터티를 부각한다. 

물론 통제만 하려는 뉴스룸의 엄숙주의는 더 큰 문제다. 최근 국내 일부 언론사는 자사 기자들의 소셜네트워크 활동을 문제삼아 소통 일체를 제한하는 일방적인 가이드라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소셜네트워크 활동은 전담 업무자에게 한정하려는 비현실적인 조치도 예고되고 있다. 기자와 언론사의 자성을 전제로 소셜네트워크 대응에 대한 진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

저널리즘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과거의 기자상에 머무는 것은 시대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기자란 더 많은 스토리를 전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독자의 눈높이와도 격이 맞지 않다. 소셜네트워크의 독자는 베일 아래 있는 기자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자에게 편향된 정치적 식견과 가담을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독자도 좋은 기자를 지켜낼 책임이 있다. 다양한 계층, 다양한 지역의 독자에게 평가받는 기자가 나와야 한다. 더 많은 소통, 더 많은 공감, 더 많은 연대를 기자가 일궈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현명하게 이끌어줘야 한다.

기자와 뉴스룸의 경쟁력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소셜네트워크에선 새로 시작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저널리즘은 물론 민주주의의 미래와 잇닿아 있다.

독자와 기자, 언론사가 서로 다른 셈법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물어진다. 독자는 집단지성의 도덕성-자정력을 지켜내고, 기자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뉴스룸은 소셜네트워크와 협력적 저널리즘 모델을 도출할 때 그 미래는 열린다.

혁신만이 희망을 변주한다

자유게시판 2011.03.25 22:35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오마이뉴스 노보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연호 대표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 대구에 있단다. 내 고향. 거기서 진보를 노래한단다.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 경의를 표한다. 오마이뉴스에게도 같은 영예를 선사하고 싶다.



올해로 창간 11년을 맞는 <오마이뉴스> 가족 여러분! 우선 지난 한 해도 참 잘 버텼습니다. 몇 해째 이어지는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은 한파에 부옇게 생기를 잃은 창문처럼 깊고 냉랭한 고독을 주었습니다. 서로를 다독이며 부여잡은 끈기와 절창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드러나는 가난, 사랑, 기침처럼 애틋하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오마이뉴스>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따로 할 말이 있겠습니까. 변함없이 자랑스럽습니다. 확실하게 든든했습니다. 이런 말들이라면 <오마이뉴스>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찬사로 충분히 족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지난 10여년간 한결같이 우리의 눈과 귀로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는 <오마이뉴스>였기에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세기의 초입에서 <오마이뉴스>는 드라마틱하게 등장해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사에도 <오마이뉴스>는 결정적 순간에서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기성 언론보다 더 우월했습니다. 역동적이었고 쌍방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사의 성찬으로 끝내고자 하니 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마이뉴스>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입니다. 영혼을 온전히 바치는 헌신적 연애담에도 유쾌한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희망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상대를 아프게 해야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안매체로서, 진보매체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오마이뉴스>는 기성매체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우리의 곁에 있지 않고 우리의 위에 있습니다. 완장도 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네트워크에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들도 중심에 있지 않고 변방으로 밀쳐 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오마이뉴스>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실종됐습니다. 정치 지도자와 권력 다툼이 <오마이뉴스>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가 사라진 대신 많은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특히 대권주자를 상품화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습니다.

블로그로, 페이스북으로, 트위터로 가버린 ‘시민’은 <오마이뉴스>와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다시 결합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그들 속으로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의 그 누구도 <오마이뉴스>를 시민의 네트워크와 연결하는데 공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십만인 클럽이란 감성 마케팅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에 앞서 편집권을 외부에 열어주는 채널도 개설했습니다. 최근에는 시민에게 원고료를 지불하는 시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방은 늦었고 순도는 약했습니다. 그 누구도 <오마이뉴스>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혁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오마이뉴스>가 설정한 프로그램에 맞춰 시민들을 오도록 했습니다. 그동안 <오마이뉴스>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기성매체를 위협하고 기성매체의 질서를 전복했습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기성매체와 격전을 치르면서 힘이 쳐지고 있습니다.

한때 <오마이뉴스>의 우군이었던 시민은 말합니다. 민주화를 외치는 이집트의 시위대도 말합니다. 네트워크는 위대하다고 말입니다. 모든 혁신은 네트워크를 위해서, 네트워크를 향해서, 네트워크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중심으로 하는 한 더욱 힘만 빠지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오마이뉴스>가 희망을 변주하기 위해서는 <오마이뉴스>를 네트워크에 온전히 헌정할 수 있는 혁신이 불가피합니다. 네트워크와 그 속의 참여자들은 이미 <오마이뉴스>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네트워크로 통째로 밀어 넣으라고 말입니다. 그 장대한 혁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덧글. 이 포스트의 원고는 지난 2월 초 작성됐습니다. 올해로 창간 11주년을 맞은 <오마이뉴스>의 노보 <소겨리> 제4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편집자가 만든 제목이 아닌 제가 단 제목으로 포스팅합니다.


트위터 변주곡, 화음인가 소음인가

뉴미디어 2010.09.03 11:13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트위터는 새로운 관계맺기를 통해 소통의 확대를 이끌고 있지만 동시에 관계의 왜소화, 기형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여지도 있다.


트위터는 간편한 이야기 장치다. 140자 이내로 글을 쓰면 된다. 딱히 주제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나'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무엇이든 상관없다. 누가 듣든 대꾸하든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일체의 간섭과 참견이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가 있다. 이들간에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에 의해 설득과 타협이라는 과제가 늘 따라 붙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고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억지로 소통에 매달리는 것이다.

반면 트위터는 개인이 쓴 글이나 공개한 이력(bio)으로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좋지 않은 관계가 예측되는 사람은 친구를 맺지 않으면(unfollow, block) 된다. 미리 이야기 시장의 정화가 이뤄져 긴장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이야기에 관한 한 자유와 해방을 준다. 학벌도 전문성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나 인지의 부족으로 익명의 비난을 굳이 감수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트위터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인 것이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친구 맺기는 더 나은 관계들을 인도한다. 가령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언론인을 만나 쉽게 소통할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관심사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다. 조건도 약속도 필요하지 않다.

때로는 어떤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전달(RT)된다. 서로 연결된 관계(follow)로 인해 수많은 사람에게 이야기가 전달된다. 더 풍성하고 긍정적인 울림이 전해진다. 누군가가 올린 글은 호감을 가진 관계들에 의해 회자돼 사회적 반향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 드라마는 가상(cyberspace)에서 시작되지만 현실(realtiy)과도 동떨어져 있지 않다. 트위터의 이야기는 사적인 동시에 공적이며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어서다. 정보, 의견, 위치 같은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재현과 재현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무한대로 확장하게 된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재현의 과정은 이야기의 진가가 무엇인지 증명해 보인다. 내가 과거에 남긴 이야기는 다시 현재에 인용된다. 또 사람의 욕망, 꿈은 친구를 맺은 사람들의 시간(timeline) 위에 끝없는 레일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조응하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약하게 된다.

그러나 트위터는 오늘날 소통의 불균형을 적나라하게 채증한다. 가족과도, 친구와도 이야기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의 단절은 개인화된 미디어 기기를 통해 더욱 철저한 고립으로 이어진다. 혼자서만 떠들기도 한다. 메아리 없는 소통을 무감각하게 방치하는 온상이 된다.

진중하게 관찰하는 느림의 태도도 부족하다. 수 초 동안 다양한 사람에 의해 쏟아지는 글들은 두 세 사람이 마주 본 채 나누는 대화라는 오랜 형식을 무너뜨린다. 그저 '지켜 보기'가 소통이 되기도 한다. 또 설득과 타협을 시도하기보다는 간단한 버튼 클릭으로 왕따 시키기를 선택할 때도 다반사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트위터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는지 손쉽게 관찰하고 언제 어디서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플라톤은 대화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훈련시키고 발달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소통에 참여하는 트위터리안들의 몫이 지대하다. 세상의 화음을 빚을 이야기꾼들의 도래를 기대해본다.

덧글. 이 포스트는 공주대학교 학보 2학기 개강호에 실렸습니다.


한국민주주의와 함께 한 한신대 70년

자유게시판 2010.04.16 17:14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춘설(春雪)이 내렸고 바람도 세차다. 봄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도 오갔다. 오늘처럼 안온한 봄이 기다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새날을 열려는 간곡한 나날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에 한신대가 있었다. 70~80년대의 시대상황에서 결코 주변인으로, 방관자로 배회하지 않은 버팀목이었다. 그만큼 그 시대를 함께 견딘 이들은 한신대의 ‘나이 듦’이 각별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

좀체 한국 사회에 지속하기 어려웠던 진보적 콘텐츠를 일으키고 대항과 대안의 구심점으로 성장했던 한신대의 과거를 떠올릴수록 그 소중함은 필설로 다하기에 부족해 보인다.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실천과 모색을 공유한 한신대 지식인들의 오롯한 면면은 한국사회를 지지하는 초석이나 다름없어서다. 어쩌면 한신대의 넉넉한 품으로 아우른 학자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는 덧없이 부류(浮流)했을 것이다.

한신대를 거쳐 간 수많은 학자들은 민중신학,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지식인의 사회참여 논쟁 등 한국사회의 주류와는 한때 격하게 대립하고 또 한때는 열정적인 찬사를 받는 주인공들로 기억된다.

특히 1980년대 한신대 경상학부는 그들이 활동하는 대표적인 무대였다. 김수행·이영훈(현 서울대)·윤소영·강남훈(한신대)·고 정운영 교수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한신경제과학연구소를 구성했다.

이들 중 얼마 전 서울대에서 퇴임한 김수행 교수는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마르크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다. 김 교수와 함께 고 정운영 교수, 끝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을 버리지 않은 박영호 교수는 ‘레전드(legend)’로 추앙된다. 한신대의 대표적 트로이카 체제로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이론의 아성을 축조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기점으로 민주화운동의 거대한 줄기를 한신대가 붙잡았다. 사실 1949년 한신대를 졸업한 고 장준하 선생이 관여했던 ‘사상계’가 그랬듯이 진보적 시선을 모으고 설득하며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담론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콘텐츠의 산실을 자처했다. 이 산실을 가꾼 학자들의 스토리텔링은 엄혹한 시기를 버티고 봄을 기다릴 수 있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한 두 명의 지식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이들이 가담했다. 경제학자이면서도 다양한 진보적 식견을 제시하며 치열한 이론논쟁을 촉박했던 국제경제학과 윤소영 교수, 한국 사관의 재탐색을 일궈낸 국사학과 이세영 교수, 경제시장의 개혁을 제기하는 국제경제학과 김윤자·김성구 교수, 성찰의 메시지를 내놓는 사회복지학과 남구현 교수 등은 대표적인 이론가들이다.

최근 한신대의 콘텐츠를 다양하게 넓히고 있는 신진 소장학자들은 90년대 초·중반 이후 교수로 임용됐다. 이들에 의해 정치, 통일, 노동의 스펙트럼에 그쳤던 진보담론의 시야도 국제외교, 문학, 페미니즘 등으로 그 지평이 뻗어갔다.

문화평론가인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 문예창작학과 서영채 교수 그리고 실업문제의 근본적 함의를 짚는 사회학과 노중기 교수, 중국에 대한 재해석을 제기하는 중국지역학과 이희옥 교수, 소설 ‘봄날’을 발표한 문예창작학과 임철우 교수, 페미니즘을 고찰하는 영문학과 고갑희 교수, 장애인 관련 사회이론을 제공하는 재활학과 오길승 교수, 학생운동 이론가로 정평이 났던 일본지역학과 송주명 교수 등이 진보학풍을 전수받은 90년대 대표적 후예들이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낸 황지우 교수는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문사(文士)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시집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펼쳐 보였다. 그는 70~80년대 학생운동으로 구속, 제적을 당하는 파란을 겪었으며 한신대와는 1985년 강사로 인연을 맺었다가 10년 뒤 94년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단지 이론 시장을 키운 것만이 아니다. 상당수 한신대 교수들은 지난한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옥고도 치루는 등 자기 희생을 감수했다. 경영학과 교수 출신의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은 과거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의장을 지내며 5.18 특별법 제정,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 방송노조 파업 등 90년대를 관통한 실천하는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참여연대, 새교육공동체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신학과 김성재 교수는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다.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는 '사회진보를 위한 민주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건학 때부터 시작된 한신대의 진보주의적 학풍은 민중신학이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김재준 목사, 문익환 목사, 안병무 박사, 이우정 박사 등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통일운동과 재야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한신대를 올려 놓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신대의 건립이념은 이소성대(以小成大)이다.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한신대 출신의 많은 학자들이 시대와 학문의 흐름을 점검하면서 한국 사회에 씨앗을 뿌렸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느 일방의 주장을 담은 콘텐츠를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보다는 다른 시선을 아낌없이 허용하는 열린 광장을 갖게 됐다.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한신대 학자들의 일관되며 따뜻한 소통, 그 작은 출발 덕분이다. 지금도 한신대로부터 출발하는 콘텐츠는 유효하고 호소력 있는 가치를 발한다. 한신대라는 브랜드 안에서 움직이는 지식인의 말과 글, 보폭이 끝없이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는 한 불멸의 기록을 써내려 갈 것이다.

축복한다. 한신대의 탄생을. 찬란한 자유를 위해 아낌없이 헌실할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고 한신대 지식인들의 명예를!

덧글. 이 포스트는 한신대 건학 70주년을 맞아 특별 발행된 관련 책자에 실린 글입니다. 청탁자와의 인연으로 아무런 연고가 없던 한신대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난 70년의 한신대 역사가 한국민주주의와 함께 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모쪼록 한신대 재학생은 물론이고 선배들에게 깊은 추억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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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영상은 지난 19일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창간 10주년을 맞는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를 만나 인터뷰한 것입니다.

오 대표기자는 오마이뉴스 그 자체의 존재감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믿음과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도중 10만인 클럽 등 오마이뉴스를 돕는 수많은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62분께) 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가 더 많은 오마이뉴스의 오 대표기자가 보는 과거, 현재, 미래를 들어 봅니다.

한 시간을 넘기는 긴 인터뷰 동영상입니다.

촬영 : 소리웹 이용진 대표





 

상품(commodity)으로서의 뉴스

Online_journalism 2010.02.12 14:31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제공되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How to Spend It?'. 이 신문은 자사의 타깃을 정한 뒤 시장과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중심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내놓고 있다. 뉴스 상품은 더욱 특별해져간다.


뉴스를 상품(commodity)으로서 접근하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등장으로 온라인 저널리즘이 확장되고 새로운 유통 질서와 광고시장이 형성되고 있어서다.

뉴스룸 내부에서는 이미 뉴스의 개념, 생산 방식, 영역(realm;독자와 시장의 니즈), 표현방식은 물론이고 뉴스를 둘러싼 소통에 대해 상당한 변화를 전개 중이다
.

이 변화는 일단 뉴스의 정의를 바꾼다. 종전의 전통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뉴스는 정보(information)를 담았다면 오늘날 뉴스는 활용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부가가치를 형성해야 한다.

즉, 뉴스 상품은 독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주나 투자자를 염두에 둬야 한다
. 또 뉴스를 재구성해 상품화할 수 있는 뉴스룸 안팎의 자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주식시장과 조응하는 뉴스는 증권사와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켜야 한다. 주식거래의 촉진을 위해 요구되는 신속성, 정확성, 신뢰성, 예측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다
.

상당수의 온라인, 오프라인 경제지들이 이를 위해 속보뉴스 조직을 꾸린 것은 뉴스 생산방식을 보다 온라인으로 이동시키는 최근의 경향을 보여준다.

일반 종합지인 조선일보가
'조선경제i'로 온라인 기반의 경제뉴스 생산에 뛰어든 것은 전통적인 신문 뉴스룸이 온라인의 역할과 비중을 더욱 높게 평가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사실 지난 6~7년 전부터 뉴스룸은 컨버전스(convergence)의 화두에 포섭돼 있었다. 온라인 뉴스 서비스를 위해 온
-오프의 통합이 일어났고, 기자들의 온라인 참여도 점점 확대됐다.

그러나 여전히 오프라인 뉴스룸에 핵심역량이 배치돼 있는 상황에서 온라인은 부가적이고 보조적인 파트로만 작동돼 왔다
.

이런 점에서 뉴스 생산방식은 더 전면적이고 혁신적으로 설계돼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technology)의 적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뉴스룸 내부에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 뉴스 서처(news searcher) 등 어시스턴트들을 전진 배치해야 한다
.

오늘날 등장하는 상품으로서의 뉴스는 뉴스룸의 기자들이 오디언스와 소통하며 신뢰의 가교를 잇고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여 쾌적한 일상의 가이드가 될 때 부가가치를 획득한다.

그들은 뉴스룸의 취재기자들과 함께 콘텐츠 기획, 유통, 서비스를 함께 설계하는 동료로서 그리고 또한 전략가로서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 각 언론사의 온라인 조직 또는 외부 기업의 인재들을 다수 스카웃해야 한다.

이들과 기자들이 창의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공간과 직무를 설계해야 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인프라도 충분히 보유해야 한다. 기사집배신 및 편집시스템을 웹 기반으로 변화하는 것
기술이 뉴스룸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을 상징한다.

이와 함께 시장과 독자가 어떤 콘텐츠를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공급자 관점의 일방적인 뉴스 생산과 배포는 더 이상 이뤄져선 안된다. 뉴스 상품은 이제 기호로서 다뤄져야 하며 시시각각 트렌드를 추적하고 리드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50만부만 발행하는 파이낸셜타임스는 지금껏 뉴스 유료화를 하고 있는 몇 안되는 언론사다. 파이낸셜타임스의 '하우투스펜드잇(How to spend it?)'은 웹으로도 제공되는데 혁신적인 UI로 상류층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

뉴욕타임스의
로컬 채널온라인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할 만큼 넉넉하다. 하이퍼 로컬 저널리즘(hyper local journalism)은 지역에 숨어 있는 광고주들을 등장시키고 공공기관과 연계돼 언론의 전형적인 영향력 모델을 잉태한다.

이렇게 시장과 독자가 원하는 것을 발굴하고 재구성하는 뉴스는 이미 거대서사에 뿌리를 둔 전통저널리즘을 보기 좋게 넉다운 시킨다. 온라인을 통해 공유되는 뉴스는 지적이며 교양적일 뿐만 아니라 참여의 출구들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상품으로서의 뉴스는 언론사가 기존에 유지해왔던 오피니언 리더 위주의 정치사회라는 무대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시민들과 접점을 맺을 때 비로서 가치를 발하게 된다
.

그래서 오늘날 선진적인 뉴스룸은 뉴스의 기획, 생산과 서비스, 유통 전 단계에서 소셜 미디어를 수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일반적으로 뉴스는 시장과 독자들과의 소통으로
점점 진화하는 과정거치게 된다.

이같은 네트워크 저널리즘(network journalism)에서는 뉴스의 생명은 네트워크와 운명을 같이 한다. 뉴스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것은 뉴스를 시장에 깊이 연루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뉴스의 내용에 수정을 가하고 추가를 하며 끊임없이 뉴스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이때에는 독자들의 의견 및 평판(reputation)에 대해 뉴스룸의 담당자가 소통하고 이를 뉴스의 업데이트에 반영한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이제 독자들에게 웹 사이트의 개선 사항을 알려고 한다. 웹 사이트가 독자들과의 소통 산물이라면 서비스되는 뉴스는 매끄러운 기술을 활용해 작품(art)의 경지에 오르고 있다.

이를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것은 최우선적인 접근 방법이다. 뉴스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의 상세정보 연결은 월등한 가치를 형성한다. 조인스닷컴 인물 정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정보를 뉴스 페이지와 직접적이고 입체적으로 연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뉴스 데이터베이스는 검색 결과로서나 존재하는데 뉴스 페이지 안에서 처리돼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뉴스의 상품화를 촉진하기 위해 외부의 기업들과 파트너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콘텐츠 기업들 예를 들면 운세, 게임, 만화, 부동산 관련 기업들과 제휴해 부가 페이지 형태로 개설하는 정도였다.

이제는 외부의 전문 콘텐츠를 바라보는 뉴스룸의 이해가 달라지고 있다. 뉴스가 더 큰 가치를 가지려면 매일 생산하는 뉴스와 접목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야 하고 독자들의 이해, 시장의 경향을 그려낼 수 있는 서비스(플랫폼)와 제휴해야 한다.

전통매체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에는 뉴스는 영향력만으로도 광고주와 독자들을 현혹할 수 있었다. 대체로 양적인 경쟁에 치중하던 때였다. 그러나 질적인 경쟁으로 접어든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에는 기술을 활용한 상품(commodity)의 격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활동까지 반영되는 뉴스 상품의 수준은 독자의 로열티,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을 좌우한다.

그러나 뉴스가 상품모델로서만 다뤄질 때에는 저널리즘이 상업주의에 젖어 들고 다원주의를 해쳐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뉴스가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방향으로 공유될 때 언론사가 행사하는 저널리즘의 영향력 모델이 복원되는 것은 당연하다. 뉴스는 민주주의와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품모델과 영향력모델은 따로 있어서는 안되고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접근 이전에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내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상품으로의 접근만을 고려해 왔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언론사들의 뉴스 유료화를 평면적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기술의 영역이 거세게 들어선 오늘날 시장에서도 뉴스의 상품화는 뉴스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뉴스룸과 저널리스트의 품위와 겸손, 지혜와 열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덕목이다. 이것은
뉴스에 대한 인식과 철학의 전환, 뉴스룸의 구조와 문화에 대한 재정립 등과 궤를 같이 한다.

뉴스 상품을 구현하기 이전에 전통매체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덧글. 이 포스트는 기자협회보 온앤오프(50)에 실린 글입니다.

실망은 이르다

Politics 2009.04.08 11:11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년 여름 '초짜' 기자이던 나는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던 노무현을 인터뷰했다. 일본과 독도문제로 갈등이 크게 일던 때였다. 그때 노 장관은 무척 감성적이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20세기에 한국사회의 시민그룹이 일궈낸 민주주의는 경이롭고 격정적인 것이었다. 때로는 군홧발을 앞세운 총검에 피를 흘려야 했지만 마침내 정권교체를 이룬 험난하지만 숭고한 길이었다. 분노와 응집, 좌절과 치욕이 교차한 지점에 민주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논란에도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에 나타난 일은 그 이전의 30여년과 비교할 때 표현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시민권이 확립됐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정치 지도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 현실정치와 부단히 조우한 덕분임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어렵지 않게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권이 축조한 철학과 가치를 바꿔 놓기에 충분한 합법적 힘과 의지를 아낌없이 동원했다. 이 결과 부수적으로 냉전 이데올로기도 회생했으며 도처에 약육강식과 개발의 논리가 떠 올랐다.

퇴행하는 정부의 소통 방식을 겨냥했던 2008년 5월의 시민 ‘촛불’이 한때 한국 민주주의가 가르켜야 할 시침(時針)을 재확인시켜줬을 뿐 그 이후로는 속속 냉정한 사법의 감시와 경계가 밀고 들어왔다. 그때문인지 용산참사도 짧은 추억이 됐다.

오히려 만연한 사회적 보수화-정치냉소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중했다. 언론인은 정부정책과 태도에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시민은 거리에서 집회의 권리를 잃게 됐다. 조악한 경제정책을 비평한 ‘미네르바’는 국가기구의 검열에 영어(囹圄)의 신세가 됐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소란한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현 정부의 관장 아래 놓인 방침과 대응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적어도 당연한 권력이동의 결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지난 10년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위기 속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정권교체의 기대감을 잃지 않은 점도 그러한 이해 아래 놓여 있다. 유권자의 표로 선출될 권력을 향한 경쟁은 언제나 새로운 정부를 상정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정치적 경쟁이라면 항상 새로운 정치문화는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던 시민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은 비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친노’와 ‘반노’ 진영의 희비와 이해득실은 접어두더라도 노 전 대통령 개인이 입은 데미지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실망은 이르다. 큰 낙담은 불우함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궁지에 몰린 노무현을 매정하게 린치하는 국면을 정면돌파하기 위해 쏟아지는 정리되지 않은 반론들도 마뜩치 않다.

예컨대 친노진영의 정치기반을 와해하려는 정치적 음모라는 시각, 전두환-노태우 비자금의 규모에 비길 바가 아니라는 일각의 반격, 차떼기 정당의 발뺌보다는 솔직한 인정과 사과가 좋다, 얼마나 청렴하면...식의 감성적 진단도 선뜻 받아들일 게재는 아니다.

으로 상당한 기간 노무현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움직였던 그룹들은 노무현으로 인한 불편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노무현’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친노 진영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쥐고 있는 것도 아니란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가혹하지만 노무현은 버려져야 한다.

반칙과 특권의 종식을 선언했던 노무현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거기서 승부사 ‘노무현’이라는 인물도 극복돼야 한다. 봉하마을과 그의 홈페이지를 응시하는데 머물러서도 안된다.

가파른 시대의 변주곡을 지휘하는 새 전망이 필요하다. 장엄한 정치적 열망을 추스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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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와 검색민주주의

Politics 2009.01.29 13:43 Posted by 수레바퀴 수레바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저서 '대중의 반역'을 통해 대중은 집단 속에 자신을 숨겨 군중심리 속에 안정을 얻는 등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로 묘사한다. 대중은 언론의 확성기를 맹목적으로 좇으며 소수의 엘리트를 과신한다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을 더 살펴 보면 대체로 불성실하고 감정적이며, 무지하고 폭력적인 집단이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에 대한 더 혹독한 평가는 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일말의 교훈을 얻고서도 곧 잊어버리는 대중의 습성은 종종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오늘날 열린 민주주의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도 바로 대중의 무기력이다.

특히 정의와 진리를 탐색하고 토의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일정한 수준의 교양이 '전통적으로' 확보되지 않은 곳에서는 사회적 야만이 그런 대중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이 야만은 거의 지식계에 의해 주도된다. 전통 미디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정보들을 내보내 사안의 본질로 연결된 통로로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지식인들은 여기에 동참한다.

이에 대해 미디어 운동가들은 (전통 미디어가) 체제의 모순이 드러나지 않도록 원하는 정보만 생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것은 종종 언론이 대중의 망각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2001년 이태리 총리에 오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대표적인 사례다.

AC밀란의 구단주이기도 한 베를루스코니는 최근 자신이 소유한 TV채널 등을 통해 세계적 축구선수 미드필더 카카(Ricardo Izecson Santos Leite)가 AC밀란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치를 말초적인 '쇼'로 전락시키고 선정적인 콘텐츠가 뒤덮여진 미디어가 총리의 실정(失政)을 엄호하는 형국이다. 이는 이태리의 부패한 사회상으로부터 대중의 망각곡선을 최고조로 앞당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20일 용산참사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촛불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는 집권세력과 이 문제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응축한 것으로 보는 시민사회세력간의 공방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야당 등에서는 첫째, 이명박 정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인명참사가 일어났을까 둘째, 용역직원들을 포함, 공권력 진압은 정당하고 적절했는가로 좁혀져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정부와 전통적 미디어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은 점거농성을 벌인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회원들의 불법 폭력시위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론조작'과 같은 새로운 딜레마가 등장했다. 지난 22일 MBC <100분 토론> 인터넷 여론조사엔 경찰의 조직적 개입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청와대는 29일 정례 브리핑에서 "인터넷에선 과격시위 책임이 있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유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고 논평했다.

과거 전통적 미디어가 주도한 여론시장에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짐작케할만한 사건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더욱 더 가공한 시사점이 있다. 단
순한 여론조작의 가능성 못지 않게 정보가 유통되는 인터넷을 통한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인터넷이 왜 사람들에게 주목할만한 것들이 됐는지 그 배경을 검토하다보면 공통적으로 만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검색이다. 검색은 원하는 정보를 찾도록 해주는 엔진(engine)에 의해 최적화된다. 이 최적화한 검색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인터넷은 하나의 채널이 아니라 수많은 채널을 모아서 한꺼번에 검색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인터넷이 번창하면 할수록 검색은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용산참사에 대한 시시비비, 정권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자료, 그밖의 수많은 지표와 데이터들이 그것이다.

아무리 여론희석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동원된 많은 인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터넷은 좋은 정보를 중심으로 더 나은 토론을 이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으로 엉성한 자료의 더미가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담론들이다.

검색은 이렇게 진실을 찾는 이용자들에 의해 더욱 향상된 기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검색과 검색이 적용된 경로로 이동하면서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다원성, 다양성에 대해 안심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안심은 아직 이르다. 인터넷과 같은 열린 플랫폼을 통제하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해서라도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단 인터넷을 감독하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가를 깨우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또 (정부에 대해) 비우호적인 콘텐츠에 대응하기 위해 우호적인 콘텐츠를 양산하는 시스템을 축조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진단도 있다.

이러한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은 검색 때문이다. 검색은 콘텐츠에 대한 양적인 접근만큼은 정중히 사양한다. 또한 검색은 어떤 일방향적인 흐름을 사전에 차단한다. 검색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지식(정보)에 대한 갈망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객관성을 잃은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도가 높은,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체계-하이퍼링크, RSS, 트랙백 같은 것들-로 탄탄하게 구조화된다.

이점에서 한국의 일부 보수매체가 네이버나 다음, 인터넷신문에 비해 신뢰도를 잃었고 지금도 '그러한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유의할만하다.

여기서 정부의 태도도 검증돼야 한다. 뒤늦게 인터넷 '정책홍보'에 나선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타율적 동원'의 흔적이 농후하다면 전통매체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를 펼쳐 보인 뒤 이중에서 선택하도록 하고 그 정보가 다시 여러가지 길을 열어두어 다른 정보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검색과 그 검색의 경로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미 인터넷 검색은 용산참사에 대해, 그리고 집권세력의 용산참사 접근방법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엇이 정의이며 진리인지를, 그리고 무엇이 대안이며 교훈인지를 말이다.

예컨대 메타블로그 사이트에서 여전히 '용산참사'는 중요한 키워드가 돼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물망처럼 서로 다른 견해들과 연결돼 있다.

이렇게 검색 민주주의(Searching Democracy)란 현재 대중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대중이 원하는 공정한 결과물들을 제시하고 그 결과물들을 토대로 논의하는 과정을 담보한다. 이 과정은 결국 참여적이며 쌍방향적인 통로를 통해 민의라는 것으로 발산된다.

이 검색에 최후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망각을 촉진하는 부산물들이 채워질 여지도 거의 없다. 지식대중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끝없이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검색은 끊임없이 민의를 반영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사회적 산물로 자리매김한다.

발전하는 민주주의에서 검색은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지평으로 승화한다. 검색시장을 장악한 포털권력이 이제 서서히 저무는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이다. 포털이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한 그것은 예상된 일이다. 비즈니스를 제패해왔지만 그 이상의 영역은 바꾸지 못할 것이다.

정치현실 속에서 다음 아고라도 변질됐고 네이버의 검색도 불량한 정보나 광고물들을 우선 제시하면서 시장의 우군들을 잃은지 오래다. 그대신 이제 검색은 지식대중에 의해 완연히 재창조되고 있다. 수많은 블로거들이 검색을 주도할 수 있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실제 이들은 이 아이디어를 적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중앙집중화된 포털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여전한 한국사회에서 수많은 검색과 검색의 경로들이 봄의 대지에 피어나는 생명들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검색 민주주의를 향한 축복으로 여겨진다.

물론 투명하고 합목적적인 검색기술에 대한 요구, 그러한 요구를 사회적으로 수용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필요성처럼 검색에 대한 공공성 확보라는 주제는 이 시대의 엄숙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같은 초유의 용어들이 회자된지 10여년이 흘렀다. 세계의 변화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어지고 있다. 그 덕분인지 검색 민주주의를 다루는 솜씨를 통해, 그것들이 구체화되는 인터넷을 통해 다시한번 한국사회의 대립과 갈등의 대치선을 볼 수 있게 됐다.

낙관적으로 들여다 보자면 그 대치선은 더 이상 나쁘지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용산참사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인터넷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고, 검색에 의해 수많은 교훈의 콘텐츠들을 남길 것이고, 그것을 유용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더 번져갈 것이고, 민주주의 그리고 철학 있는 정치적 리더에 대한 갈망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그래서 (대중으로 하여금) 오늘날 향유하는 검색과 그것이 지향하는 그 어느때보다 명확하고 지혜로운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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